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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쟁에 대해 알아보기

◈악기 Introduction

by ♣Icarus 2020. 2. 2.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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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쟁은 아시아 금쟁류 악기 중 유일한 찰현 악기로 안족 위에 음 높이 순으로 얹은 7 ~ 10개의 줄을 막대기나 말총활로 문질러 연주하는 악기인데요. 이 번 포스팅에서는 아쟁이 무엇인지? 와 아쟁의 역사(아쟁의 기원과 한국 수용,아쟁의 발전,현대의 아쟁) 등 악기 '아쟁' 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쟁이란 무엇인가?


아쟁(牙箏)은 거문고나 가야금같이 넓적한 판형 몸통에 안족(雁足, 기러기발, movable frets)을 세워 명주실을 꼬아 만든 줄을 걸고 막대기나 말총활로 비벼 연주하는 치터류 악기(bowed zither)인데요. 한국의 아쟁은 고려시대에 중국 송(宋)의 음악, 무용과 함께 들어와 정착하고 이후 분화한 것이다. 아쟁 중 정악용 대아쟁(大牙箏)은 한국 전통 선율 악기 중에서 음역이 가장 낮은 악기이며.....현 악기 중 크기가 가장 큰 악기이기도 합니다.


아쟁은 현악기이지만, 전통 음악에서 아쟁 파트는 해금과 함께 흔히 관악으로 취급하는데.....이는 전통 음악에서 현악기 하면 주로 거문고나 가야금처럼 줄을 뜯어 연주하는 치터(flucked zither)를 가리키고.....아쟁이나 해금과 같은 찰현악기는 지속음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음악 특성이 관악기와 유사하다 보기 때문입니다.


전통 음악에서 아쟁이 독주악기로 쓰이는 경우는 아쟁산조(牙箏散調)에서뿐이며.....그 밖에는 언제나 합주에만 편성되는데.....북한에서는 고악기(古樂器)로 분류하여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개인적으로 아쟁의 독주 연주도 참 매력 있다 생각하는데 아쉽습니다.)



◈아쟁의 역사


⊙아쟁의 기원과 한국 전파: 아쟁의 한자 표기 ‘牙箏’은 중국 옛 문헌에 나오는 ‘軋箏’(알쟁) 또는 ‘戞箏’(알쟁)이라는 이름이 변형되거나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이는데.....‘箏’은 치터류의 통칭이고 ‘軋’과 ‘戞’은 모두 ‘비빌 찰’(擦)과 통하므로, 알쟁은 ‘(막대기나 활로) 줄을 비비는 치터’ 라는 뜻입니다. 이런 찰현 치터가 아시아 어느 지역에서 언제 맨 처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다만, 중국 송(宋)나라 때 편찬한 당(唐, 618~907년)나라 역사서인 『구당서』(舊唐書, 945년)에 알쟁(軋箏)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9세기부터는 중국 음악에서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당서』의 알쟁은 “대쪽의 끝을 매끄럽게 하여 그것으로 그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以片竹潤其端而軋之, 因取名焉) 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연주법을 ‘긋는다’ 즉 비빈다고 명시하고 다만 요즘 같은 활이 아니라 대쪽으로 긋는다고 한 점은 좀 특이합니다. 좀 더 나중의 음악이론서인 『악서』(樂書, 1104년)도 이 설명을 그대로 갖다 쓰면서 그림을 추가했습니다. 줄 수를 명기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 그 시대 중국의 금(琴)류나 쟁(箏)류 같은 정규악기로 정착하지 않았음을 시사 하는 것입니다.(그 당시에는 아쟁이 많이 천시 받았던 듯 함.)


이 알쟁이 언제 한반도에 흘러들어왔고 언제부터 알쟁 대신 아쟁으로 부르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반도는 삼국통일 전후인 7세기 말부터 당을 통해 중국 음악을 본격적으로 들여오기 시작하였고.....고려시대(918~1392년)에는 송의 궁중음악을 당악(唐樂) 즉 중국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폭넓게 수용했으므로.....아쟁도 당악과 함께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 하였을 것입니다.


조선 초 편찬된 『고려사』(高麗史)에는 「악지」(樂志) 중 ‘당악’(唐樂) 항목에서 “아쟁, 줄 일곱”(牙箏, 絃七)이라 하여 현재의 정악용 대아쟁처럼 줄의 수와 이름, 한자 표기도 지금과 같은 아쟁이 고려시대 당악에 쓰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쟁의 발전: 조선 개국 초 궁중 음악 및 의례 정비를 담당한 임시관청인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는 세종(世宗) 12년(1430년), 이전 시대인 고려의 제도를 정리해 보고하면서 당악기에 아쟁을 포함시켰습니다. 세종 사후 1450년 무렵 완성된 『세종실록』(世宗實錄) 중 「오례 서례」(五禮序例)는 의례상정소 등의 활동 결과를 종합한 것인데.....여기 나오는 아쟁 그림이 한국 문헌에 보이는 최초의 아쟁 그림입니다. 「오례 서례」의 아쟁은 안족의 개수로 보아 줄은 일곱 개이며.....왼편 미단이 꺾였고 그 위에 부들을 풍성하게 얹은 모습, 악기 아래편에 가로놓인 나무막대기(활대) 등을 볼 때 완연한 정악용 대아쟁의 모습입니다.(조선 시대부터 아쟁이 본격적으로 발전했던 것은 우리나라 악기사에 있어서도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함.)


조선 성종 때 편찬한 궁중음악 종합 참고서적인 『악학궤범』(樂學軌範, 1493년)은 「당부악기도설」(唐部樂器圖說)에서 아쟁을 당부 즉 중국계 악기로 소개하면서 그림, 해설 및 산형(散形: 조율법 그림)을 상세히 덧붙였습니다. 『악학궤범』의 아쟁 역시 줄이 일곱인 정악용 대아쟁이다. 해설에 “옛날에는 당악에만 썼으나 지금은 향악(고유음악)에 겸용한다”(古只用唐樂, 今鄕樂兼用之)고 하여 아쟁이 조선 초 이미 향악기로도 쓰이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당악(중국음악)과 향악에 겸용한다고 하면서 분류는 당부악기로 한 것은 『악학궤범』의 악기 분류 기준이 음악의 쓰임이 아니라 악기의 기원이기 때문입니다.


『악학궤범』의 아쟁 활대는 지금 같은 개나리 가지가 아니라 ‘출단화목’(黜壇花木: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불확실함) 껍질을 벗겨 만들며, 송진을 바르는 것은 지금과 같습니다. 산형(조율법)으로 ‘당악조’(唐樂調), ‘평조’(平調), ‘계면조’(界面調)의 세 가지를 나열했는데....이 중 당악조가 중국음악(당악)의 산형이고 나머지 둘은 향악의 산형에 해당합니다.



『악학궤범』의 편찬자 중 한 사람으로 성종(成宗) 때 예조판서를 지낸 성현(成俔, 1439~1504년)은 개인 잡문집인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동시대 아쟁 연주자로 김도치(金都致)라는 이를 으뜸으로 꼽으면서 “옛날에 김소재(金小材)라는 이가 아쟁에 능하였으나 (세종 때 통신사 일행으로 파견됐다가) 일본에서 죽은 뒤 한동안 아쟁 음악이 끊겼다가.....지금 임금(연산군)이 각별히 관심을 가져 재주꾼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고 적었습니다.


조선시대부터 아쟁의 음색은 흔히 애절한 소리나 귀신이 우는 듯한 ‘귀곡성’(鬼哭聲)으로 인식되었던 듯 합니다. 동시대 문인들인 유몽인(柳夢寅, 1559~1623년)과 허균(許筠, 1569~1618년)은 모두 선조(宣祖) 때 아쟁 명수인 김운란(金雲鸞, 또는 金雲蘭)이라는 양반 출신 아쟁 명수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는 김운란이 아쟁으로 타는 계면조 음악을 듣는 사람은 하나같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였고.....유몽인의 문집 『어우야담』(於于野談)은 한층 더 과장을 보태 “김운란이 집 근처 산기슭 낡은 사당에서 아쟁을 켜자 사당 안의 귀신들까지 대성통곡하여 김운란 자신이 놀라 달아났다”고 하였습니다.


이들과 비슷한 시기 문장가로 유명했던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년)의 다음 한시는 여행 중에 궁중 악사일 듯한 연주자의 소리를 여러 사람이 함께 듣는 가을 밤 정경을 읊었습니다. 아쟁이 현악기이면서도 소리는 관악기를 닮았다는 것, 원망이 사무치는 소리라는 것 등을 감칠맛 나게 노래하였습니다.(현악기이면서 소리는 관악기를 닮은 이러한 아쟁의 특징이 필자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음.)



현대의 아쟁: 20세기 들어 아쟁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들로는, 창극(唱劇) 반주악기로서 새로운 표현성을 획득한 것, 소아쟁과 아쟁산조의 탄생, 다양한 개량 등을 들 수 있는데요.


창극은 한 사람이 부르던 판소리를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 연극으로 고친 음악극인데.....판소리가 고수 한 사람의 북 반주만 대동하는 데 비해 창극에는 으레 관현악 반주가 따르는데.....이 창극 반주 악기로서 표현성이 뛰어나고 음량도 큰 아쟁이 특별히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쟁 특유의 애절한 표현성은 20세기 말부터 전통음악과 서양식 대중음악을 결합한 국악퓨전(fusion)음악 및 실내악이 등장하면서 또다시 대중의 이목을 끌었고.....2005년에는 다섯 명의 아쟁 연주자가 전무후무한 아쟁 앙상블 ‘아르코’(ARCO)를 창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아르코는 꼭 한 번 관람해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1942년 박성옥(朴成玉, 1908~1983년)이 무용과 창극 반주 음악에 사용할 목적으로 기존 아쟁(대아쟁)을 참고해 최초의 소(小)아쟁을 선보였는데.....한일섭(韓一燮, 1929~1973년)이 처음으로 완성한 아쟁 산조는 바로 이 소아쟁에 최적화된 음악이었습니다. 정악용 대아쟁도 기존의 일곱 줄에 저음 줄 2~3개를 보강한 아홉 줄 또는 열 줄 짜리가 가장 널리 쓰이는 형태로 자리잡았고.....북한도 분단 직후부터 민족악기 개량사업을 추진하면서 아쟁의 개량을 실험했으나 포기하고, 지금은 아쟁을 고악기로 분류하고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민족의 전통을 중요시한다고 선전하고 있는 북한이 아쟁 연주를 하지 않는 것은 참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임.)


1950년대부터 대학교에 한국음악 전공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오랫동안 아쟁은 전공자를 따로 뽑지 않고 같은 찰현악기인 해금 전공자들이 부전공으로 아쟁까지 하는 식이었으나.....1986년부터 아쟁 전공이 독립하기 시작해 지금은 대부분의 한국음악 전공 학과에 아쟁 전공을 두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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