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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의 역사?

◈악기 Introduction

by ♣Icarus 2020. 2. 4.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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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대표적인 찰현악기인 바이올린은 16세기 전반 북 이탈리아의 브레시아와 크레모나 등의 악기 제작자가 당시 예전부터 사용되고 있던 현악기를 개조하여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바이올린의 역사(1600년대 까지,1600년대~1820년,1820년~현재)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600년 까지의 바이올린


사실 바이올린의 기원을 찾는 학자들 역시 이 악기의 시초에 대해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데요. 1550년경 이탈리아에서 바이올린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형태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바이올린과 유사한 형태의 악기가 제작되고 있었으나.....빠른 실험을 거치고 있던 이 무렵의 바이올린은 많은 변화의 과정 속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이올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악기를 서술하는 일에는 악기의 모양뿐만 아니라 악기의 연주방식 및 배경 등이 고려되어야 하며.....그러한 점에서 중세시대의 피들과 레벡(rebec)이 바이올린의 시조로 꼽히고 있습니다.(피들과 레벡이 바이올린의 시조라는 주장이 가장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지만...아직도 바이올린의 시조에 대해 의견이 분분함.)




바이올린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악기로는 1400년대의 5개 혹은 그 이상의 현으로 된 알토 음역의 중세 피들과, 2개 혹은 3개의 현으로 된 작은 배(pear) 모양의 레벡(rebec)을 꼽을 수 있는데.....중세 피들과 레벡이 모두 바이올린과 유사한 특징을 지니지만 이들 악기는 브릿지가 없거나 혹은 브릿지의 모양이 평평하다는 점에서 현을 활로 그어 연주하지 않고 뜯어서 연주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활로 소리를 냈다고 해도 하나의 음을 지속해서 연주할 뿐, 줄을 바꾸어 소리 내는 섬세한 연주는 불가능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브릿지의 각도에 따라 현의 위치가 달라지므로 평평한 브릿지로는 여러 현을 자유롭게 연주하며 다양한 음고의 선율을 만들어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후 1400년대 후반에 아치 모양의 브릿지가 사용되면서 비로소 선율 연주가 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되며.....그 후 바이올린은 활로 현을 그어 소리 내는 찰현악기(擦絃樂器, rubbed string instrument)로 발전되었습니다.


또한 이 당시 바이올린과 유사한 악기로 비올(viol) 을 꼽을 수 있는데.....외형뿐만 아니라 바이올린과 명칭도 유사한 비올은 바이올린보다 크기가 더욱 크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부드럽고 음향이 풍부하지만 활의 사용에 있어 표현력은 다소 부족한 비올은 진지한 느낌의 대위적인 음악과 성악을 반주하는 데 적합하였습니다. 반면, 활력이 느껴지는 바이올린은 1500년 이후 새롭게 작곡된 다성부(多聲部) 춤 음악에 이상적인 악기로 받아들여 졌는데요. 또한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비올은 비올이라는 명칭에(당시에는 viola라 칭했다) ‘다 브라치오, da braccio(팔에, on the arm)’ ‘다 감바, da gamba(다리에, on the leg)’라는 말을 뒤에 붙임으로써 바이올린과 구분되어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바이올린은 1490년경 같은 모양의 악기가 여러 크기로 제작되는 콘소트(consort) 형태로 발전되었는데요. 악기의 크기에 따라 공명통의 성질과 현의 길이, 굵기, 무게 등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른 음역대의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고, 이로써 여러 성부로 된 다성음악(polyphony)을 현악기로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콘소트는 일찍이 14세기에 숌(shawm), 플루트, 리코더와 같은 관악기에서 발전되기 시작된 것으로, 피들에도 콘소트 개념이 적용되면서 바이올린 족(violin family)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바이올린 족에 대해 처음으로 묘사한 자료에 따르면(Lanfranco의 Scintille di musica) 당시에는 1대의 바이올린과 2대의 서로 다른 크기의 비올라, 1대의 베이스 바이올린이 콘소트를 이루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이러한 편성은 16세기 바이올린 콘소트에 있어서 모범적인 전형이 되었던 것으로 이 악기들은 모두 3개의 현을 지녔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3개의 현으로 된 당시의 바이올린은 4번째 현이 추가되면서 더욱 복잡해지게 되었는데.....베이스의 낮은 음역으로 새로운 현이 추가되기도 했지만, 1600년대 초에는 높은 음역에 4번째 현이 추가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장브 드 페르(Philibert Jambe de Fer, 1515년경 ~ 1566년경)는 4개의 현으로 된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오늘날과 같은 음정으로 조율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기록에 남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이올린은 1550년대부터 1600년 초까지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내려오는 400년이 넘는 오랜 동안 큰 변화 없이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필자는 1550년대~1600년 초 까지가 바이올린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고 생각함.)


16세기 바이올린 발전 초기 시대의 저명한 악기 제조가로는 브레시아의 자네토 다 몬티치아로(Zanetto da Montichiaro, 1489~90-1560~61)와 그의 아들 페레그리노(Peregrino, 1520년경-1606~09), 가스파로 다 살로(Gasparo da Salò, 1540-1609), 크레모나의 안드레아 아마티(Andrea Amati, 1511년경-1577)를 꼽을 수 있지만.....이 시기 제작된 바이올린에는 제작자가 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제작자의 바이올린이 서로 다른 스타일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제작자의 진본 여부에 대한 의심이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1600년대-1820년의 바이올린


17세기가 시작되면서 바이올린은 솔로 악기로 발전하기 시작하며, 이탈리아의 ‘브레시아’ 와 ‘크레모나’ 가 바이올린 제조의 명가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브레시아에는 제조가 가스파로 다 살로(Gasparo da Salò, 1540-1609)와 지오 파올로 마지니(Gio Paolo Maggini, 1580-1630~31)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16세기 초부터 명성을 얻고 있었고.....크레모나가 처음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제조가 안드레아 아마티와 그의 자손들 덕분으로, 안드레아 아마티의 아들 안토니오 아마티(Antonio Amati, 1540년경-1607)와 지롤라모 아마티(Girolamo Amati, 1561년경-1630)는 ‘아마티 형제’ 로 일하며 최고의 악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아마티 가문의 바이올린은 지롤라모의 아들 니콜로 아마티(Nicolò Amati, 1596-1684)에 의해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1630년 이후 아마티 가문의 제작 비법은 가족이 아닌 제자들에게도 전수되기 시작하는데요. 아마티에게 비법을 전수받은 대표적인 제조가는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 1644~49-1737)와 안드레아 과르네리(Andrea Guarneri, 1623-1698)로, 스트라디바리는 바이올린 역사에 있어 최고의 악기를 남긴 전설적인 명장입니다


과르네리 역시 현악기로 가문의 명성을 높인 제조가로, 그의 손자 주제페 과르네리 ‘델 제수’* (Giuseppe Guarneri ‘del Gesù’, 1698-1744)는 과르네리가문에서 가장 뛰어난 명장이 되어 그 후로 200년 동안 스트라디바리와 더불어 가장 위대한 명장으로 꼽히고 있습니다.(바이올린 역사에 가장 중요한 인물을 말해 달라고 하면 필자는 주저없이 스트라디바리와 주제페 과르네리를 꼽습니다.)  


* 과르네리라는 이름 뒤에 ‘델 제수(del Gesù)’가 붙는 것은 그의 바이올린 라벨에 성인문자(I.H.S., iota-eta-sigma)와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기 때문인데.....‘델 제수’는 ‘예수님의’ 라는 뜻으로 과르네리 가문의 다른 명장과 구분하기 위해 ‘델 제수’ 라는 말을 붙입니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는 브레시아와 크레모나 이외의 다른 이탈리아 지역에서도 뛰어난 바이올린 제조가가 활동하였는데.....또한 17세기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제조가로 오스트리아의 제조가 야콥 슈타이너(Jacob Stainer, 1617년경-1683)의 바이올린이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니콜로 아마티의 문하에서 제작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슈타이너는 티롤 지방의 압잠(Absam)에서 활동했으며.....앞면과 뒷면이 둥근 아치형의 바이올린을 제작하였습니다. 더불어 크레모나 스타일과는 다른 슈타이너의 바이올린은 많은 찬사를 받으며 17세기와 18세기에 유행하게 됩니다.



독일의 미텐발트(Mittenwald)와 프랑스의 미르꾸르(Mirecourt) 또한 17세기 바이올린 제조의 중심지로 잘 알려져 있었는데요. 미르꾸르 지역에서 제조법을 배운 제조가들은 파리로 이주해 19세기 초 파리는 바이올린 제조의 중심지로 자리매김 합니다. 특히 니콜라스 루포(Nicolas Lupot, 1758-1824)는 당시 크레모나에서 활동하는 제조가들보다 스트라디바리의 원리를 잘 이해한 명장으로 칭송 받았습니다. 또한 프랑스 파리는 ‘투르트 가문(Tourte family)’ 덕분에 가장 세련된 디자인과 최고 품질의 활을 생산하는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8세기 후반에만 해도 오늘날처럼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을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1785년 판 백과사전(Encyclopédie Méthodique)에는 “야콥 슈타이너는 아마티를 잇는 위대한 명장이다. 요즘 스트라디바리는 좋은 바이올린을 상당히 많이 만들고 있는 숙련된 제조가이다. 스트라디바리의 바이올린은 남성적이며 파워풀하고 듣기 좋은 톤을 지니고 있다” 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위에서도 언급했었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스트라디바리가 최고임.)


 


이처럼 18세기 백과사전은 바이올린에 대해 오늘날과는 다른 평가를 하고 있지만.....18세기 말부터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1780년대에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 조반니 바티스타 비오티(Giovanni Battista Viotti, 1755-1824)가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과 과르네리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하면서 이 두 악기가 아마티와 슈타이너의 악기보다 뛰어나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입니다.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는 악기의 몸통이 갖는 곡선의 정도가 크지 않기 때문에 연주자가 기교적으로 화려한 음악을 연주할 때 자세가 더욱 편리하였습니다. 비오티가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의 악기를 인정한 이후로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은 지금까지도 그 자체로 완벽한, 최고의 가치를 지닌 악기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18세기 후반까지도 바이올린을 잡는 자세는 아직 정형화되지 않았는데요. 바로크 초기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바이올린을 가슴에 대고 스크롤 부분을 거의 허리까지 낮게 낮추었으며.....그것은 오늘날의 자세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독일의 음악가 요한 레오폴트 모차르트(Johann Georg Leopold Mozart, 1719-1787)는 1756년 바이올린을 잡는 두 가지 자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이올린을 가슴에 대고 연주하는 방법은 우아하지만 포지션 이동에 있어서 불편한 반면, 턱 아래 바이올린을 두는 방법은 편하면서도 효율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1700년대 후반에만 해도 두 가지 방법이 모두 사용되던 바이올린의 연주 자세는 1820년경 루이스 슈포어(Louis Spohr, 1784-1859)의 턱 받침(chin rest)발명으로 현대의 자세로 연주자세가 굳어지게 되었고.....또한 턱 받침과 더불어 어깨 받침도 제작되면서 바이올린을 고정하고 연주하여 포지션 이동과 보다 빠른 연주가 가능한 악기로 발전되었습니다.(턱 받침과 어깨 받침도 바이올린의 발전에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


18세기 중엽에는 바이올린 구조에 있어서 변화가 나타났는데.....바이올린이 연주회장에서 돋보이는 악기로 각광받게 되면서 더 많은 청중을 위한 큰 음량과 화려한 음색의 악기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에 따라 울림기둥(soundpost)의 크기가 오늘날과 같이 커졌고 저음 울림대(bass-bar)가 악기를 더욱 튼튼하게 받쳐주게 됩니다. 또한 높은 음역을 편하게 연주하기 위해 바이올린의 목과 지판이 길어지고, 바이올린의 목은 더욱 뒤로 젖혀진 오늘날과 같은 모양이 되었습니다.




1820년 이후 현재까지의 바이올린


1820년 이후 바이올린의 몸통이 평평한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이 콘서트용 악기로 각광받은 반면, 아치 형 몸통에 작은 톤의 슈타이너 바이올린과 아마티 바이올린은 예전의 인기를 잃고 있었는데요. 19세기 초에 이르자 콘서트가 많아지고 바이올린을 배우는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좀 더 저렴한 악기에 대한 수요도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공장에서 악기가 생산되기 시작했으며.....프랑스의 미르꾸르와 독일의 미텐발트, 마르크노이키르헨을 중심으로 대량 생산되어 합리적인 가격에 음질 좋은 바이올린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어 영국과 미국, 이탈리아, 스위스, 폴란드와 같은 나라에도 바이올린 제조 학교가 설립되어 바이올린 제조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됩니다.


19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바이올린 제조가로 장-밥티스트 비욤(Jean-Baptiste Vuillaume, 1798-1875)을 꼽을 수 있는데요. 1827년에 자신의 회사를 설립한 비욤은 1855년에 이탈리아 바이올린을 사들이고 그것을 카피하였습니다. (‘메시아(Messiah)’는 스트라디바리와 같은 훌륭한 악기들을 카피하여 대량 생산한 것이다.)


한편 1920년대 이후 지금까지 바이올린족 악기로 전자 악기를 만들기 위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는데요. 전자 바이올린은 튼튼한 몸통의 바이올린이 전자로 증폭되거나 혹은 마이크로 연결되어 전자음이 만들어집니다. 또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칼린 허친스(Carleen Hutchins, 1911-2009)와 그녀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선보인 ‘콘서트 바이올린’도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음향학적으로 다른 주파수를 갖는 8개의 악기를 바이올린족으로 묶은 허친스는 콘트라베이스 바이올린(contrabass violin, 바이올린의 길이 130cm)부터 소프라니노 바이올린(sopranino violin, 일반적인 바이올린보다 한 옥타브 높게 조율되는 바이올린)까지, 크기가 다른 바이올린을 제작함으로써 새로운 바이올린족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우리나라에서는 '유진 박' 이 유명한데요. 필자가 보기에 전자 바이올린도 나름 매력이 있는 것 같음.)




바이올린이라는 악기가 탄생한 이후로 450 여 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도 바이올린의 ‘음향 개선’ 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바이올린은 1550년경 이탈리아에서 처음 등장한 모습에서 큰 변화 없이 제작되고 있으며.....이전의 바이올린에 비교해 현대 바이올린은 크게 달라진 점이 없습니다. 300년 전에 제작된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은 지금도 여전히 바이올린의 화려하면서도 당당한 위용을 전해주며.....전설적인 악기라는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또 오래 전에 제작된 ‘올드 바이올린’이 ‘현대 바이올린’보다 더 좋은 것 인지에 대한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꼭 그럴 필요는 없다’ 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여전히 이전 시대의 명장이 만든 올드 바이올린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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