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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금의 기원과 역사

◈악기 Introduction

by ♣Icarus 2020. 2. 9.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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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번 기생들(거문고와 양금 연주)



양금은 18세기에 일종의 호사 취미로 중국을 통해 한반도에 소개되었고.....비교적 단순한 한 손 연주 악기로 급속도로 향악화하여 19~20세기에 걸쳐 풍류방,유흥가,궁중 등으로 전파되었는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악기 '양금' 의 역사(기원과 한반도 유입,조선 말의 양금,현대의 양금)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 상세히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양금의 기원과 한반도 유입


양금류 악기의 기원과 분포 그리고 변이


양금은 덜시머 계통의 현악기인데.....사다리꼴의 평평한 공명상자 위에 금속제 줄을 얹고 조그마한 채로 줄을 쳐 연주하는 치터류 악기를 덜시머라고 통칭하고.....이 악기들의 전신은 고대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지역 악기인 산투르로 알려져 있습니다.(후대의 산투르와 구별하기 위해 필자는 편의상 '고형 산투르' 라고 부르겠음.) 


'산투르' 는 페르시아어로 '100개의 줄' 을 뜻하며 그 기원은 고대 바빌로니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고형 산투르는 이후 서남아시아 지역 음악에서 중요한 악기로 연주되었고.....현존하는 형태로 정비되고 고도의 기교를 바탕으로 한 연주가 가능하게 된 것은 아랍 문화의 전성기였던 10세기 경 이슬람 학자 '알 파라비' 에 의해 개량되면서 부터 인데요.(양금이 우리나라에서는 역사가 짧지만...전 세계로 확장해 보면 상당히 오래된 역사를 지닌 악기임.) 



산투르


서아시아와 인도 등지에 전파된 고형 산투르는 인근 나라로 퍼져나가 산티르(이라크),산뚜르(인도),산두리(그리스) 등 다양하게 현지화 된 이름을 얻었으며.....이란,터키,그리스,이집트 등지에서 전통 음악 연주에 널리 사용되는 오늘날의 산투르로 발전하였습니다.


고형 산투르는 기독교 세계의 십자군 원정기인 12세기 무렵 남유럽과 서유럽에 전파되어 14세기 스페인에서 둘세마, 15세기 프랑스에서 두스멜, 영국에서 덜시머 등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요.


16세기 중반에는 헝가리 집시에 의해 '침발롬' 이라는 이름으로 동유럽 전역에 전파 되기도 하였는데.....침발롬은 헝가리,루마니아,슬로바키아,우크라이나 일대에서 널리 사용되었고.....오늘날까지 집시 음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집시 음악에서 침발롬은 정말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악기임.)


침발롬은 여타 덜시머 계통의 악기와 달리 악기의 몸통을 지탱하는 다리와 줄의 진동을 조절하는 페달 장치가 있는데.....침발롬은 클라비어 류 악기인 쳄발로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습니다.(현재 서유럽과 일부 북유럽에서는 덜시머 계통의 악기를 주로 '하크브레트' 라고 하며...영어권에서는 주로 '해머 덜시머' 라 부르고 있음.)



독일의 하크브레트


고형 산투르에서 갈라져 나온 산투르,해머 덜시머,하크브레트,침발롬은 사다리 꼴의 평평한 공명통에 금속 줄을 얹은 줄때림(타현) 악기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악기 구조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산투르는 줄 한 벌마다 하나 씩의 이동식 브리지로 받치는 반면(낱괘), 해머 덜시머와 하크브레트,침발롬은 공명통에 고정된 긴 막대꼴 브리지로 여러 벌의 줄을 한꺼번에 받칩니다.(통괘).(한국의 양금은 이 중 통괘를 쓰는 덜시머 계통의 악기에 속함.)


②덜시머의 중국 유입


이규경은 '구라철사금자보' 에서 중국에 덜시머가 유입된 경위를 중국 문헌을 인용하여 "구라금(양금)이 중국에 들어온 것은 이마두(리마더우)로부터 비롯되었으며...천금(톈친)이라고 이름하니 이는 곧 철사금이다."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마두는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 의 중국식 이름인데.....마테오 리치는 명나라 말기인 1580년 경 중국에 도착하였고.....1602년 당시 신종 황제를 만나 많은 물건을 바쳤고.....그 중에 덜시머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이후 덜시머는 중국에서 톈친(천금),양친(양금) 등으로 불려지게 되었음.)


③양금의 한반도 유입


중국의 양친이 한반도에 처음 소개된 것은 18세기 무렵이었는데.....양친에 대한 국내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강세황' 의 '표암유고' 중 '팔물지' 에 나오는 '서양금' 인데요.(다른 국악기에 비해 상당히 늦은 편이긴 함.)


팔물지에서 "서양금은 비파와 달리 연음이나 농현의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없고...우리나라 사람 중에 간혹 이것(서양금)을 사서 오는 사람이 있지만 그 연주법과 성조가 어떤지는 알지 못합니다." 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유경종도 '해암고' 중 계미년 부분에서 "어느 집에 갔다가 서양금을 보았는데...종이에 쓴 곡보(악보)가 뒷면에 붙어 있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라고 서양금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이후 정조 때 궁중음악 기관인 장악원의 전악 자리에 있던 박보안이 당시 청의 수도인 연경(베이징)에 가서 양친의 연주법을 처음으로 배워 와 '동음' 즉 우리나라 음악으로 옮겨 전했고.....구술로만 전해지던 박보안의 음악이 잊혀질 것을 염려하여 순조 17년(1817년)에 역시 전악인 문명신이 악보를 만들었으며.....이를 이규경이 '구라철사금자보' 에 수록하였습니다.(책 제목에서 '구라' 는 유럽을 뜻하며...'철사금' 은 양친을...'자보' 는 문자 악보를 뜻합니다.)


청나라 문물에 관심이 많던 연암 박지원(1737~1805)도 청나라 여행기인 '열하일기' 중 '동란섭필' 에서 "양친이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같은 북학파 학자인 홍대용(1731~1783)이 1772년에 향토(조선) 곡조를 양금으로 풀어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박지원,홍대용 등 북학파 실학자들이 양금의 국내 유입과 연주에 큰 역할을 하였음.)


이들 기록을 종합해 보면 양금은 18세기 초~중엽 이미 조선에 소개되어 있었으나.....연주법을 알지 못해 악기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다가 18세기 후반 박보안,홍대용 등 조선 음악인과 학자들에 의해 실험적으로 나마 우리나라 음악 연주에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말의 양금


양금은 19세기 들어 한국 악기화되며 궁중과 민간에 급속히 퍼져 나갔는데.....궁중에서는 연향(잔치)에서 여러 악기들과 합주 형태로 연주되었고.....궁중 정재(무용)의 반주 음악에도 쓰였습니다.(필자가 예전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었지만...우리나라에 들어온 국악기는 거의 상류층->중류층->하류층 순으로 전파되었다고 보면 됨.) 


궁중에서 양금이 연주된 양상은 순조~고종 대까지 편찬된 몇몇 의궤의 반차도를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가 있는데.....흥미로운 점은 양금이 한반도에 유입되기 전인 1605년(선조 38년) 4월에 삼청동 관아에서 13인의 재신들이 각자의 노모를 위해 연 경수연을 기록한 '선묘조제재경수연도' 의 모사본에 양금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선묘조제재경수연도' 는 현재 원본은 없고 이를 거듭 모사한 '의령남씨가전화첩' 에 수록된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본과 '의령남씨전가경완도' 에 수록된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본 그리고 '경이물훼' 에 수록된 국립문화재 연구소 소장본의 세 가지 본이 전해지고 있는데.....이 중 시기적으로 가장 늦은(19세기) 문화재 연구소 본에 양금이 그려져 있습니다. 


앞선 두 본(홍익대 본 17세기,고려대 본 18세기)에서 주안상을 앞에 두고 대기하거나 참관하는 여인들 자리에 문화재 연구소 본은 양금을 연주하는 여성을 그려 넣었던 것인데.....그림을 거듭 전사하는 과정에서 본래 그림에 없었을 양금이 추가된 것은 19세기에 양금이 애호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민간 악회인 풍류방의 음악에도 으레 양금이 편성되었음은 현재 남아 있는 19세기 중엽~20세기 초의 수십 종에 달하는 양금 악보집들이 증명하고 있는데.....이들 양금 고악보 중에는 악보 뿐 아니라 양금의 유래,조현,연주법 등도 함께 싣고 있는 것들이 꽤 있습니다.(풍류방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연주 활동을 하며 풍류를 즐기던 곳을 지칭하는 것인데...조선 후기에 경제적으로 성공한 부유한 중인 출신들이 많이 애용 했었음:필자도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 


풍류방의 양금은 '영산회상', '여민락', '도드리' 계통의 기악 합주곡 뿐만 아니라 가곡,시조 등의 성악 반주에도 두루 편성되었는데.....양금은 독주 악기로는 쓰이지 않고 음량이 작은 현악기 위주의 관현합주(줄풍류: 세악)에 1 대가 편성되는 것이 보통이고 단소와 함께 병주로 연주되기도 합니다.



구라철사금자보


비교적 근세에 도입된 양금이 이처럼 급속히 향악화 될 수 있었던 것은 외국 문물에 대한 18~19세기 양반과 중인 위주 사회 특유의 왕성한 호기심이 작용한 데다가 양금이 처음부터 향악용으로 주법을 단순화하여 보급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그 결과 오늘날 한국에서 양금은 "향악기이지만 드물게 농현이 없는 악기" 로 인식되고 있고 필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음.)


③현대의 양금


20세기에 들어 양금은 궁중과 풍류방의 문턱을 넘어 민간으로 널리 전파되는데.....20세기 초에는 특히 예기(기생)들의 교육기관인 권번을 통해 유흥가로도 흘러들어 갔고.....20세기 초의 연주 사진을 보면 예기들이 무릎 위에 양금을 얹어 놓고 연주할 정도의 적당한 크기였으나.....이후 양금의 크기가 점차 커지는 경향을 보였는데.....전통적인 양금은 4 줄을 1벌로 하여 총 14벌(56 줄)의 줄이 매어져 있고 그 크기는 규격화(정형화)되어 있지 않아 악기 제작자 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였습니다.




현재 전통 양금은 주로 전통 악곡 연주에 쓰이며 20세기 후반부터 성행하기 시작한 창작 국악 관현악 등의 창작곡 연주에는 개량 양금 또는 중국의 양친, 북한의 양금 등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데요.


개량 양금은 개량 주체나 연주자에 따라 규격이나 체재가 다른데.....1985년~1989년 국립 국악원에서 전통 양금의 울림통을 크게 바꾸고 줄을 24벌로 늘려서 음량과 음역을 확대한 개량 양금을 만들었으나.....실험적 성격이 강해서 실제 사용되는 경우는 적었습니다.


현재는 주로 양금 연주자들이 각자 악기 제작자와 협업하여 개별적으로 개량한 양금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으며.....이렇게 개량된 양금은 16벌,18벌,38벌 등으로 줄 수가 다양한데.....일부 연주자들은 중국 양친(48벌)이나 북한 양금(37벌)을 선호하기도 하는데요.(국악기 중에 양금이 제일 다양하게 개별적으로 제작되는 것 같음.)



양금은 외래 악기 중에서도 한반도에 수용된 역사가 짧을 뿐 아니라 조율이 까다롭고 음계와 음역에 제약이 있으며.....무대 위 조명의 열기 만으로도 줄의 음 높이가 미세하게 변하는 등 사실 악기로서의 한계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 음악을 넘어 현대 창작곡들 에서까지 양금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필자가 생각하기에 전통 악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양금 특유의 금속성 때문인 것 같습니다.(현재 이 의견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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