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예종 11년(1116년)에 우리나라에 처음 전해진 편경은 고대 중국에서 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악기로 중국 주나라 시대부터 아악기의 하나로 포함되었다고 하는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악기 '편경' 의 기원과 발전 그리고 편경의 한국 전래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 자세히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편경의 기원과 발전
편경은 고대 중국에서 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신화 시대라고도 하는 삼황오제 시대에 처음 제작되었다는 설도 있지만.....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중국 최초의 왕조인 상나라(은나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현재까지 발굴된 사료로 보자면 기원전 2000년 경부터 원시적 형태의 경이 사용되었음.)
이 시기의 경은 40~100cm 사이의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만들어졌는데.....기원전 1200년 경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3~5개의 경으로 구성된 악기가 헤난성 북부 안양시에서 발굴되었고.....이전 시기의 경들과 달리 세심하게 연마한 대리석 재질이었으며.....직사각형 혹은 삼각형 형태로 다음어져 있었습니다.(이 경들의 표면에는 호랑이나 물고기 등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음.)
편경은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들어선 주나라 시대부터 편종과 함께 아악기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주나라 중기인 기원전 5세기 경부터 악기의 크기가 확대되고 형태도 규범 화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전 시대와는 달리 경의 표면에 무늬를 새기는 관습은 줄어들었는데.....이 시기에 제작된 편경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기원전 433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유물은 후베이 지역에서 발굴된 것으로 증나라의 제후 을의 무덤에 부장품으로 포함된 것이었는데.....편경이 부장되는 관습은 무덤 주인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편경의 희소성과 문화적 의미를 짐작케 합니다.(필자가 보기에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은 똑같은 것 같음.)
이 무덤에서 발굴된 편경은 모두 32개의 곡척형 경이 두 개의 단에 매달린 형태로 각각의 경은 5개의 면으로 깍여 있는데.....이 편경은 음 높이가 다른 38개의 음을 연주할 수 있도록 제작된 것으로.....너비 215cm, 높이 109cm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할 뿐 아니라 수준 높은 예술적 감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나라에서 사용된 편경은 경의 두께를 동일하게 유지하되 그 크기를 달리 하여 반음계의 음정들을 낼 수 있도록 제작되었는데.....즉 경의 크기가 작을수록 높은 음고를 소리 낼 수 있었습니다.(필자가 직접 가서 보았는데 타이베이의 유교 사원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형태의 편경을 사용하고 있음.)
주나라 초기에 아악에 사용되는 악기들을 제작하고 이를 소재에 따라 금,석,목,토,혁,죽,포,사의 8음으로 분류하였는데.....이중 석부는 영속성과 불멸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에 속하는 편경은 제례악에서 매우 중요한 악기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외국 음악인 호악이 유행하면서 아악은 점차 쇠퇴하게 되는데.....그리하여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대대적인 아악 정비 작업이 진행되었고.....이 시기의 아악 정비에 대해서는 북송의 음악가 '진양' 이 쓴 '악서' 그리고 '마단임' 이 쓴 백과사전 '문헌통고' 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진양은 재정비 된 당나라의 아악을 자세히 기술하였는데.....그는 아악을 악현과 등가로 나누어 설명하였고 악현은 제사를 지내는 사당의 뜰에서 연주되는 기악합주이며 등가는 이 합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였습니다.
악현의 구성은 제사를 주재하는 사람의 지위에 따라 네 가지로 구분되는데.....황제가 지내는 것은 궁현, 제후가 지내는 것은 헌현, 경대부가 지내는 것은 판현, 사가 지내는 것은 특현이라 불렀습니다.
악기 편성과 배치도 각각 다른데.....황제는 동서남북의 4면에, 제후는 동서북의 3면에, 경대부는 동서의 2면에, 사는 북쪽에만 악현을 설치할 수 있었고.....이러한 구성은 이후 조선으로 전해져 헌가의 구성에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편경도 이 시대 때는 안타깝게도 일반 서민들은 사용할 수 없었고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는 것이 유럽의 악기사와도 많이 닮아있는 부분임.)
등가에서는 현악기와 관악기가 연주되었는데.....악기들은 사각형으로 배치되었고 그 가운데에는 여덟 가지 관악기와 한 가지 타악기가 각각 12개 씩 아홉 줄로 배치되었습니다. 또 다른 악기들은 그 둘레에 배치되는데.....편종,특종,편경,특경이 4면에 각각 세 틀 씩 배치되고 세 가지 북은 네 모서리에 배치되었습니다.
진양이 이처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아악의 재정비 시기 즉 12세기 경부터 편경은 동일한 크기의 경 16개로 제작되었는데.....크기는 같지만 경의 두께를 달리함으로써 16개 반음을 소리 낼 수 있도록 한 것이었고.....우리나라에 전파된 편경은 바로 이 형태의 편경으로 이러한 구성이 표준 형태로 자리 잡으면서 청 왕조에서도 동일한 형태의 편경을 계속 고수하였습니다.
◈편경의 한국 전래
편경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고려 예종 11년인 1116년으로.....이보다 2년 앞선 1114년에 송나라의 대성아악을 들여온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요. 예종 9년 송나라에 갔던 사신 안직숭은 송의 휘종이 하사한 악기와 곡보를 가지고 돌아왔고.....이 대 들여온 악기는 철방향,석방향,비파,오현,쌍현,쟁,공후,피리,적,지,소,포생,훈,대고,장구,박판 등이었으며.....10부의 곡보와 악기 연주법을 담은 지결도 10 점도 함께 가지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예종은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116년에 하례사로서 왕자지와 문공미를 파견하였고.....휘종은 대성아악을 연주하는 데 필요한 등가악기와 헌가 악기를 대량으로 하사하였는데.....이 때 전해진 악기는 금,슬,소,생,화,우,소,관,훈 등으로 각각 2부 씩이었고.....등가에 정성과 중성의 편경 각 한 틀,헌가에 정성과 중성의 편경 각 아홉 틀 씩이었습니다.
이렇게 수입된 아악기들은 처음 전해진 예종 9년에 왕이 친히 태묘에서 송의 새로운 음악을 아뢴 것을 시작으로 하여 풍년을 기원하는 사직과 동지에 제사를 지내던 원구,국빈을 대접하는 연향 등에 사용되었습니다.(아악기가 귀족들의 전유물이기도 했고...또 상당히 크고 중요한 행사에만 사용 되었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악기들이 손상되었으며.....대악서와 관현방의 악공들을 제대로 훈련시킬 역량을 가진 교사도 부족하였는데.....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고자 승지 서온이 송나라로 건너가 연주법을 익히고 돌아와서 악공들을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공민왕 8년에 홍건적이 고려를 침범한 이후 편경과 편종 등 대부분의 악기들이 소실되었는데.....그리하여 공민왕 19년에 성희득이 명나라로부터 아악기들을 다시 들여왔고.....이 악기들과 송나라에서 들여온 대성악기가 함께 사용되면서 대성악의 성격이 상당히 모호해졌는데요.(항상 외세의 침입이 문제인듯...우리나라도 그렇고 서양도 마찬가지로 외세의 침입과 전쟁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많은 문화 유산이 소실되었음.)
이러한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해 공양왕 1년에 악학을 설립하고 1391년에 아악서를 설립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이듬해인 1392년에 고려가 멸망하면서 명맥이 끊어지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악학과 아악서의 노력은 조선 왕조에서도 계속되었고.....태종 때에도 명나라로부터 다양한 악기들을 들여와서 궁중 제례악에서 연주하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