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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의 기원과 발전

◈악기 Introduction

by ♣Icarus 2020. 2. 11.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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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부터 한반도 북부와 중국 북동부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악기 '가로저' 가 원형인 '대금' 은 7세기 삼국통일 전후에 우리나라에서 주요 향악기로 정착하여 고려와 조선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악기 '대금' 의 기원과 발전(통일신라 시대,고려 시대,조선 시대)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 상세히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금의 기원


'대금' 이라는 명칭이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1145년' 권 32 '악지' 중 신라악 관련 항목에서 였는데요.


여기서 대금,중금,소금을 묶어 '삼죽' 이라 부르고.....'삼현'(거문고,가야금,향비파),박판,대고 와 함께 신라 악기로 나열하였습니다.


'악지' 에서는 신라 삼죽이 '당적' 즉 중국 젓대에서 왔다고 적고 있는데.....그러나 사실 가로저(횡적) 종류의 악기들은 한반도가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전인 선사 시대부터 한반도 북부와 중국 북동부에 두루 분포하고 있었고.....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 사이의 뼈젓대(골제적: 뼈피리) 유물이 지금 북한 지역인 함경북도 옹기군 굴포리 유적에서 출토되기도 하였습니다.(고로 대금은 다른 국악기들처럼 중국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선사 시대부터 한반도에 원래 있었던 뼈젓대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 일 것 같음.)


기원전 2000년 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굴포리 뼈젓대는 새의 다리뼈로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13개의 구멍이 있고 취구 부분이 파손되어 가로저인지 세로저인지 확실히 구분할 수 없는 상태였고.....길이는 13.5cm에 지름 1cm인 매우 작은 크기여서 소리도 매우 높았을 것이므로.....이것이 실제로 악기로 쓰였던 것인지 굿이나 장례 같은 의식에 의물로 사용되었던 것인지 분명치는 않습니다.


그러나 설령 의식용으로 제작된 것이라 하더라도 당시 이미 이런 형태의 원본 악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뼈젓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약 6만 년 전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독수리 뼈젓대,5만 3천 년 전 네안데르탈 인류의 곰 뼈젓대,4만 년 전 슬로베니아의 뼈젓대 파편,3만 년 전 프랑스의 사슴 뼈젓대 등이 발굴 된 바 있고.....가까운 중국에서도 허난성과 네이멍구 자치구에서 맹금류 뼈로 만든 일곱 개의 구멍이 있는 신석기 시대 젓대가 발굴 되기도 하였습니다.(이전 포스팅들에서도 필자가 언급했었던 것처럼...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역사가 오래 된 악기들이 종종 있었지만 대금의 역사는 그 중에서도 진짜 최고인 것 같음.) 




신라 또는 통일신라에서 대금,중금,소금 으로 구분해서 부르기 전 삼국의 젓대 원형에 관한 기록은 중국과 일본 등 이웃나라 기록들에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는데.....이들 기록에 젓대 종류는 '횡적','횡취' 또는 그냥 '적' 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으며.....'삼국사기' 이후 한문으로 된 한국 기록에서도 대금보다는 '적' 종류가 훨씬 자주 쓰였습니다.(필자가 생각에 '저,젓대,저대' 같은 우리말도 아마 한자어 '적' 에서 나왔을 것 같음.)


문헌과 유물 외에 벽화나 다른 유물에 그리거나 새겨진 형태들을 널리 도상이라 하는데.....젓대 도상으로 6~7세기 고구려 고분인 중국 지린성 지안현 오회분 4호묘 벽화나 7세기 백제 유물인 계유명 아미타불 삼존상에 부조된 가로저 연주상 등을 들 수 있고.....이를 통해 삼국 시대부터 다양한 종류와 크기의 가로저가 한반도에서 쓰이고 있었으며 이것이 통일 전후의 신라에서 크기에 따라 대금,중금,소금으로 분류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대금의 발전


⊙통일신라 시대의 대금


대금은 신라의 삼국통일(676년) 전후에 신라를 대표하는 악기인 '삼현삼죽' 의 하나로 정착하였는데.....삼현은 세 가지 현악기이고 삼죽은 대나무로 만든 세 가지 젓대이며.....또 삼죽은 크기에 따라 젓대를 대,중,소 로 표준화 한 것입니다.


대나무로 만든 삼국과 통일신라의 대금 실물은 현재는 아쉽게도 남아 있지 않은데.....다만 경주에서 옥돌로 만든 젓대 즉 '옥적' 은 출토 된 적이 있었습니다.(대나무 대금이 정말 중요한 유산인데 정말 안타까운 일임.)




'삼국유사' 의 만파식적 설화를 보면 젓대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 듯 한데요.



만파식적


이야기에 언급되는 월성(경주) 천존고에는 만파식적 외에 고구려계 현악기인 거문고(현금)도 함께 보관되어 있는데.....이 이야기는 갓 통일된 삼국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통합할 의도로 젓대와 거문고 같은 악기에 신비한 힘을 부여한 것으로 해석됩니다.(필자가 보기에 삼국을 하나로 뭉치게 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 같음.)


벽화에 그리거나 유물에 새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주악상' 이라 하는데.....그중 가로저 연주 모습이 포함된 주악상이 새겨진 유물로는 통일 신라 초기인 682년(신문왕 2년)의 감은사 청동사리기, 725년(성덕왕 24년)의  범종 그리고 통일신라 말기인 904년(효소왕 8년)의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 등이 있습니다.




⊙고려의 대금


조선 초 편찬된 '고려사(1451년)' 의 '악지' 에서 삼국과 고려의 음악인 향악을 '속악' 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는데.....그중 '고려 속악' 에 "대금(大琴), 구멍 열 셋" 이라는 기록이 있고 여기에 나오는 '大琴' 은 명백히 '大笒' 을 잘못 쓴 것이었습니다. 


이는 한국에서 오래전부터 '笒' 을 원음 '함' 이 아닌 '금' 으로 읽었다는 증거가 되는데.....대금과 중금은 모두 작은 글씨로 "구멍 열 셋" 이라 딸려 적었고 이는 고려의 대금과 중금에 취구 하나, 청공 하나, 지공 여섯 개 외에 칠성공(대금,중금,소금 등 가로로 부는 젓대 아래 끝)이 다섯 개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고려 속요 중 문인들의 풍류 생활을 노래한 '한림별곡' 에는 '적' 이라는 악기가 등장하는데.....같은 노래 안에 중금이 따로 있는 것으로 보아 '적' 은 대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한림별곡 학창 시절 시험에 많이 나왔었죠? 그땐 전혀 몰랐었지만...그 한림별곡 에 종종 나왔던 '적' 이 바로 대금을 가리키는 것이었더라고요.)


 한림별곡



고려 말 이제현의 문집인 '익재난고' 에도 '적' 과 '중금' 이 함께 등장하는 대목이 있는데.....이때의 '적' 은 대금일 수도 혹은 젓대류의 총칭 일 수도 있으며 어느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익재난고


⊙조선의 대금


조선 세종때 우의정을 지낸 맹사성(1360~1438), 역시 세종때 음악 개혁 실무를 총괄한 박연(1378~1458), 성종 때 '악학궤범' 을 편찬한 성현(1439~1504) 등은 모두 젓대를 잘 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훗날 세조로 등극하는 수양대군 이유(1417~1468)도 수양대군으로 봉해지기 전인 진평대군 시절 부왕(세종) 앞에서 가야금과 함께 젓대를 연주하여 부왕의 칭찬을 받기도 하였습니다.("내가 왕이 될 상인가?" 라고 말했던 쿠데타 왕 수양대군이 젓대를 즐겨 연주했다니 참 의외네요. 아무튼 악기 공부를 하며 역사 공부까지 일석이조 굿.)


조선 초 궁중음악 백과사전인 '악학궤범' 중 향악기를 다룬 '향부악기도설' 에서 당시 사용된 대금의 모습을 그림 및 상세한 치수와 함께 설명하고 있는데.....'악학궤범' 의 대금은 칠성공이 다섯 개로 고려 시대와 같고 지금(두 개)보다는 세 개 더 많았다고 하였고.....재질은 오늘날의 쌍골죽이 아니라 황죽을 주로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전체 길이와 취구의 크기 등이 오늘날의 정악대금보다 조금 작았는데.....대금의 치수는 조선 전기부터 후기를 지나 현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점차 커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서 '악학궤범' 에서는 중금과 소금 항목을 따로 두지 않고 대금 항목에 "중금과 소금의 규격 및 악보도 (대금과) 같다." 라고 하였는데.....대금,중금,소금은 규격이 엄밀하게 규정된 것이라기 보다는 대략의 크기에 따라 편의적으로 나눈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조선 궁중음악의 대금 사용은 실록,예서,의궤 등에 실린 궁중 악공 오디션,궁중 제사 및 의식과 잔치,일본 통신사에 딸린 음악인들과 관련된 기록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는데.....국왕의 도성 밖 행차나 우리나라 사신 전송,외국 사신 영접 등에는 행진하는 군악대가 따랐고 그 중 선율악기 연주자들을 '세악수' 라 불렀으며.....세악수는 삼현육각 계열로 편성되었습니다.


궁궐과 중앙 관청 외에 지방의 관아에도 소속 악공들이 있었는데.....이들의 주로 하는 음악도 삼현육각 편성이었고 대금이 빠짐없이 들어갔습니다. 또 관아 악공들과 민간의 악공들 사이의 구분이 언제나 명확하지는 않아.....관청 행사 음악에 민간 악공들이 차출되거나 일반 가정집의 잔치나 심지어 무속 행상에 관청 소속 악공이 파견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관아와 민간, 중앙과 지방의 음악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악곡을 공유하게 되었는데.....관아와 민간 악공들의 음악은 여러 가지 형태의 대풍류와 춤 반주 음악,굿판의 음악인 시나위,독주 기악곡인 산조 등에 자취가 남아 있는데요.(포스팅을 하면서 종종 언급했었지만...필자는 대부분의 전통 악기들이 옛날에 지배층과 귀족들의 전유물이어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 한 것을 항상 안타깝게 생각했었는데...대금은 조선 시대에라도 이렇게 귀족 음악과 서민 음악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발전할 수 있어서 다행인 것 같음.)



기록이나 구전을 통해 이름이 남은 조선시대 대금 연주자로 허억봉,정약대,최학봉 등이 있는데.....허억봉은 선조 때의 대금 연주자이며 궁중 음악기관인 장악원의 악사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거문고 악보집인 '금합자보' 중 적보 즉 대금 악보 편집을 도운 인물입니다. 


또 정약대는 19세기 중후반 왕의 호위부대인 어영청 소속 세악수였는데.....날마다 서울 옥인동(인왕산 동쪽 기슭)의 너럭바위 위에 올라가 나막신에 모래알을 가득 채우고 '도드리' 라는 곡을 한 번 불 때마다 모래알 하나씩을 버려 나막신이 텅 비면 그제서야 산을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최학봉도 당대에 정약대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던 실력파 대금 연주자였지만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음.)


1897년 대한제국 성립 전까지 조선 궁중의 대금 연주는 예조 산하 장악원의 악사와 악공들을 통해 명맥이 이어져 왔는데.....조선 후기 궁중 잔치들을 기록한 의궤에는 당시 궁중 연주에 동원된 장악원 소속 대금 연주자들의 이름과 급료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러나 1897년 대한제국 선포로 장악원은 교방사에서 장악과로 또 아악대 등으로 개칭을 거듭하다가.....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이왕직아악부' 로 격하되었고 광복 후에는 '구왕궁아악부' 가 되었는데.....조선 장악원부터 이어져오던 궁중 대금 음악의 명맥은 1951년 국립 국악원으로 이어졌고.....그 밖에 민간의 풍류방들과 민속음악 현장에서도 대금 연주자들이 활동하였습니다.(일제강점기 시대는 예술 분야 뿐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탄압을 받던 시기라 발전하기가 어려웠음. 지금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열 받게 되는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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