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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카혼의 비극적 역사

◈악기 Introduction

by ♣Icarus 2020. 2. 14.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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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혼' 은 16세기부터 19세기 말 사이에 남아메리카에 노예로 끌려간 아프리카인 들이 나무 상자를 북처럼 연주하기 시작했던 것이 기원이 되어 탄생한 타악기인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악기 '카혼' 의 비극적 역사(기원,주요 발생지,플라멩코와 페루 카혼의 결합,룸바와 쿠바 카혼,21세기의 카혼 국제 축제)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 상세히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카혼의 기원


카혼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16세기에 본격적으로 아메리카 대륙 정복에 나선 에스파냐는 아메리카 대륙의 토착민들을 노예로 삼아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식민지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하였습니다.('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 유럽인들에게는 기회가 되었지만 아메리카,아프리카들 에게는 악몽의 시작이었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토착민의 인구가 급감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는데.....그 이유는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오면서 유럽의 전염병까지 함께 건너왔기 때문이었고.....아메리카의 토착민들은 유럽에서 건너온 생소한 바이러스에 취약할 수 밖에 없었는데.....특히 천연두의 유행으로 수 많은 토착민들이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습니다.(유럽에서 건너온 전염병으로 인해 어느 한 지역에서는 토착민들이 모두 전멸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음: 여기서도 느끼게 되는 약소 민족의 설움.)


한편 토착민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농장을 운영하던 유럽의 정복자들은 토착민을 대신할 노동력을 구해야 했고....그리하여 유럽인들이 눈을 돌린 곳이 바로 아프리카였는데.....그렇게 16세기부터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흑인 노예들이 대거 유입되었으며.....아프리카인 들을 강제로 데려오는 일은 19세기 말까지 계속 되다가 링컨 대통령에 의해 노예 제도가 폐지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되었습니다.




강제로 타지에 끌려와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암울한 상황 속에서 고향과 고향의 음악을 그리워 하였는데.....아프리카인 에게 음악은 단순히 듣고 즐기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삶이 고단하고 힘들수록 음악에 더 기댈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쉽게 설명하면 기독교의 복음성가,찬송가 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됨.) 


대부분 서아프리카 지역 출신이었던 흑인 노예들의 음악과 종교 의식에서는 무엇보다 북이 중요하였는데.....이들에게 북은 음악의 핵심이었고 소통의 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강제로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노예로 살고 있었던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고향에서 사용하던 것과 똑같은 북을 만들어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게다가 쿠바를 포함한 카리브 해 연안 지역에서는 식민 당국이 북 연주는 물론이고 아프리카의 악기나 음악,종교 의식 전반을 금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식민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흑인 노예들은 고향에서 쓰던 아프리카의 전통 타악기 대신 농기구나 주방기구,서랍이나 나무 상자처럼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물건을 악기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특히 항구에서 수출품을 선박에 싣고 내리는 데 썼던 포장 상자가 악기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전방위적으로 식민 당국의 탄압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상황이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듯: 이 대목에서 '일제강점기 시대' 시대가 오버랩되며 열 받고 있는 필자.)



흑인 노예들은 빈 나무 상자를 깔고 앉아서 그 앞면을 두드리거나 편한 곳에 걸터앉아 상자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윗 면을 두드리면서 상자를 북처럼 연주하였는데.....연주를 멈추면 그저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식민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습니다.(그들은 이 새로운 악기를 에스파냐어로 상자,서랍 이라는 뜻의 '카혼' 이라고 불렀음.)


◈카혼의 주요 발생지


'카혼' 이라는 이름의 악기가 발생한 주요 지역은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던 페루의 항구도시 리마와 쿠바의 항구도시 아바나와 마탄사스 였는데.....식민지 무역에서 항구 도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그 이유는 물건이 들어오고 나가는 통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구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고 당연히 많은 흑인 노예들이 있었으며.....물론 항구에는 물건을 운반하고 남은 다양한 크기의 나무 상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페루에서 생겨난 카혼과 쿠바에서 생겨난 카혼은 이름이 같지만 생김새와 연주법은 서로 달랐는데.....페루의 흑인 노예들은 직육면체의 상자 위에 앉아 손바닥이나 손가락으로 상자의 앞면을 치면서 음악을 연주하였던 것에 비해 쿠바에서는 상자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그 윗 면을 두드려 연주하였으며.....또 쿠바의 카혼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통이 좁아졌지만 페루의 카혼은 다른 형태의 직육면체 모양이었습니다.(물론 페루의 카혼이 휠씬 더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지만...필자 개인적으로는 쿠바의 카혼을 더 선호함.) 




서로 다른 지역에서 이처럼 비슷한 과정을 통해 이름마저 같은 악기가 탄생한 것은 한편으로는 매우 신기한 일이지만.....다른 한편으로는 아프리카의 문화가 아메리카라는 환경과 만나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결과라 볼 수 있고.....아메리카의 토착민,유럽에서 이주해온 백인,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흑인들이 상호 작용을 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형성했다는 것이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특징이었습니다.(필자가 보기에 페루,쿠바 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그러한 생각을 뒷 받침하는 대표적인 예이면서 증거가 바로 카혼 인 것 같음.)



페루의 카혼


플라멩코 와 페루 카혼의 결합


페루에서나 쿠바에서나 카혼으로 연주한 최초의 음악은 당연히 아프리카의 전통 음악이었는데요. 하지만 노예 제도가 폐지되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흑인들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문화를 결합한 새로운 '아프로라틴' 장르를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는데.....카혼은 마리네라, 란도, 페스테호, 톤데로, 사마쿠에카 같은 아프로라틴 춤-음악 장르에서 빈번히 사용되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음악에서 북과 리듬이 중요했던 만큼 카혼 역시 이런 장르에서 중요한 악기로 대접 받았는데.....카혼은 점차 흑인들 뿐 아니라 크리올료(라틴아메키라 토착민과 유럽인의 혼혈) 문화에 까지 유입되어 유럽의 왈츠에서 기원한 발스 크리오요 등 크리올료 춤-음악 장르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파코 데 루시아


주로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만 사용되어 오던 카혼이라는 악기가 라틴아메리카 이외의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인데.....그 결정적 계기는 페루 카혼과 '플라멩코' 라는 장르의 결합이었고.....1970년 대에 세계적인 플라멩코 기타리스트 '파코 데 루시아' 는 자신의 밴드를 이끌고 남미 순회 공연을 하던 중 페루의 카혼을 처음 접하게 되었으며.....페루의 유명한 카혼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카이트로 소토' 가 파코 데 루시아에게 페루 카혼 하나를 선물한 것이 그 시작이었는데요.(필자가 생각하기에 카이트로 소토가 파코 데 루시아에게 페루 카혼을 선물한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였음: 밑에서 언급하게 되는 엄청난 '나비 효과' 의 시작.) 


파코 데 루시아는 페루 카혼의 소리가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그때부터 자신의 밴드에 카혼을 추가해 플라멩코의 리듬 악기로 사용하였고.....카혼 연주는 파코 데 루시아의 밴드의 타악기 연주자 '루벰 단타스' 가 맡았습니다. (파코 데 루시아와 루벰 단타스는 카혼의 소리에 매력을 더하기 위해 악기 내부에 기타 줄을 장착하는 모험을 감행했는데...결과는 대성공이었음.)


그렇게 기타 줄과 살짝 틈이 벌어진 나무 상자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사운드와 단타스의 탁월한 연주로 페루 카혼은 플라멩코에서 절대 빠져서는 안되는 중심적인 타악기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기타 줄을 장착한 개조된 카혼을 오리지널 카혼과 구별하기 위해 '플라멩코 카혼' 이라 불렀음.)



플라멩코


플라멩코를 통해 전 세계 음악 청중들에게 익숙해진 페루 카혼은 오늘날 아프로라틴 음악이나 플라멩코 외에도 록,팝,재즈,포크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음악 장르에서 사용되고 있으며.....프로 연주자 뿐 아니라 아마추어 연주자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쿠바 카혼에 거의 쿠바에서만 연주되는 것에 비해 페루 카혼은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면서 많은 인기를 끌었음: 물론 위에서 필자가 언급했던 '나비 효과' 때문.) 


파코 데 루시아를 통해 페루 카혼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많은 대중음악 장르에 널리 쓰이게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카혼' 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페루 카혼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습니다.


◈룸바와 쿠바 카혼


쿠바의 경우 카혼이 흑인들을 포함한 더 많은 쿠바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경 부터 였는데.....특히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발생한 아프로큐반 춤-음악 장르인 룸바를 연주할 때 카혼이 자주 사용되었고.....얼마 지나지 않아 툼바도라(콩고 드럼) 같은 악기들이 카혼을 대체하면서 룸바 밴드의 연주에서 카혼의 모습을 보기 어려워졌지만.....오늘날 까지도 쿠바에서는 룸바 계열의 음악을 포함한 다양한 음악에서 여전히 카혼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요.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룸바 계열의 음악을 주로 연주하는 '죽은 자를 위한 카혼' 인데.....서아프리카 요루바 족의 종교와 서구에서 건너온 카톨릭이 결합되어 탄생한 종교인 '산테리아' 의 의식인 죽은 자를 위한 카혼은 액을 쫓고 건강과 행운,종은 결과를 기원하는 의식이며.....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의식에서는 카혼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쿠바 카혼은 페루 카혼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쿠바에서 만큼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음.)


죽은 자를 위한 카혼 의식


또한 최근에는 룸바 음악가들이 룸바의 가장 오래된 스타일로 알려진 '얌부' 를 연주할 때 카혼을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21세기의 카혼 국제 축제


페루 사람들은 2001년에 카혼을 '국가 문화유산' 으로 지정할 정도로 카혼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강한데.....그래서 카혼을 보전하고 계승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페루에서는 매년 '국제 카혼 축제' 를 개최하고 있는데요.(필자가 페루 여행 계획을 세우며 꼭 가보려고 하는 축제.)


페루 국제 카혼 축제는 2008년에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처음 개최된 이후 매년 4월 같은 도시에서 개최되고 있는데.....축제를 처음 기획한 사람은 페루의 카혼 연주자 '라파엘 산타 크루즈' 였으며.....페루 카혼과 아프로페루 문화를 알리는 데 앞장섰던 그는 초창기 페루 카혼 연주자로 유명한 '니코메데스 산타 크루즈' 의 조카이면서 책 '아프로페루 카혼' 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라파엘 산타 크루즈가 2014년 축제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뒤 현재는 그의 부인이 그의 뒤를 이어 축제를 이끌어 가고 있는데.....페루 국제 카혼 축제는 카혼은 물론이고 여러 지역의 타악기를 소개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장으로.....공연,강의,영상 상영회,마스터 클래스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라파엘 산타 크루즈는 카혼의 계승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페루 국민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었음: 필자가 보기에도 현대 카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임.)


 

카혼 축제


하지만 이 축제가 유명해진 이유는 무엇보다 최대 인원의 카혼 합주 기네스 기록 때문인데.....페루 국제 카혼 축제는 2009년에 처음으로 천 여 명의 카혼 연주자가 모여 함께 연주를 함으로써 최대 인원 카혼 합주 기네스 기록을 세운 뒤.....2012년과 2013년에 잇달아 이 기록을 경신하였고 2015년에는 2 천 여 명이 모여서 연주를 함으로써 엄청난 대 기록으로 다시 한번 기록을 경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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